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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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yday chill

-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티비를 켰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마침 왓챠에서 리마스터링판들을 큐레이션 해주길래 화양연화를 픽. 왜인지 줄거리부터가 내 취향이었다.


-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첸 부인은 늘 큼지막한 보온병을 들고 국수집을 찾는다. 여기서 허기는 외로움. 허기를 영영 잊은 채로 살 수는 없으나 매번 국수 이상의 것으로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 둘은 수시로 이별 연습을 한다. 다가올 미래에 익숙해두기 위한 둘만의 방법이다. 여자는 진짜가 아닌데도 울고, 진짜일 것이기에 운다. 진짜가 될 것이기에. 그러므로 더 크게 터지는 울음은 당연히 후자이다. 전자의 슬픔은 우리가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스며드는 슬픔이라면, 후자의 슬픔은 우리 또한 그들이기에 터져나오는 슬픔이다. 그래서 모두의 몸과 마음을 적시게 한다. 딱 비만큼의 슬픔.

-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 2046 호텔에서의 시간도, 국수집에서의 대화도, 이 영화의 모든 부분이 좋았지만 특히 손에 꼽게 좋았던 부분은 소나기가 퍼붓는 골목에서의 대화, 그리고 옆방의 마작소리를 배경으로 한 방에 우연찮게 갇히고 만 둘의 대화. 두 장면이 너무너무너무 좋았다. 비에 감춰보지만 채 씻어보낼 수 없는 마음이 비로소 밖으로 튀어나오는 그 장면. 각자의 외로움과 허기를 채우려 쓸쓸히 국수집을 가던 바로 그 길에서의 담백한 고백.




- 그들이 아닌 우리로 존재하고 싶은 둘을 그려냈기에, 영화의 미니멀한 구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완벽했다. 배우자들의 존재감이 크게 드러났거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장면들이 디테일하게 포함되었다면 영화의 퀄리티는 오히려 떨어졌을 것이다. 어딘가 외롭고 쓸쓸하지만 작은 온기가 어린, 딱 그 정도의 서사라서 좋았다. 영상미는 말할 것도 없고.




- 양조위와 장만옥의 눈빛이 다 한 영화이기도 했다. 옛 집 테라스에서 건너집을 바라보는 장만옥의 눈물어린 눈은 정말 보석같았고, 비에 흠뻑 젖은채로 자신이 떠나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양조위의 눈빛, 아니 영화 전체에 ‘흐르는’ 양조위의 눈빛이 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