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습 896일차 - 상담 일기 1

 

(아차차, 명함을 깜빡하고 두고 왔다.. 다음에 가면 꼭 받아와야지)

인생 첫 상담을 시작했다. 오래 묵은 무기력도 슬픔도 좀 흘려보내고 싶어서..
선생님은 굉장히.. 따스한 내면을 가진 사람 같은 느낌. 옆팀 팀장님을 닮으신 것 같기도 하고.

첫 시간이니만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 인물들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으로 한시간을 거의 채웠다.
팀원 구성,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떻고, 팀 밖에는 누가 있고, 내 직무는 어떤 직무고, 이런 것들. 어떤 부분에서는 생각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울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눈물에 내가 당황하며 이건 울 이야기가 아닌데 왜 눈물이 나지.. 했는데, 선생님이 ㅇㅇ씨, 이게 울 얘기인거예요, 하셔서 참.. 마음이 울렸다.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 안심이 되나.
선생님은 내가 ‘가치로운 것’에 중점을 두는 사람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오늘 상담을 통해 들은 바로는 나는 가치롭지 않으면 그게 업무가 되었든 인간관계가 되었든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작년 내내 취미를 확보하려 애썼다는 말에 그걸로는 충족되지 않는것 같지 않았냐고 하시는데 그것도 너무 잘 맞았다. 작년 내내 안하는 것 없이 다 해보려 했는데 어떤 걸 해도 충분하다고 느껴지지가 않았으니까.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 나를 채워주지 않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러니 충분히 재미가 없었을만 하다고 이야기해주시는데 굉장한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가 자주 부적응자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요즘 들어 팀이 화목한 모습을 보다보면 내가 없어야 완성되는 그림처럼 느껴졌다(이 얘기는 담주에 해야지).)사내에서 소위 좋은 팀으로 꼽히는 곳에 있는데 이리도 마음을 못붙이고 방황하는 내 자신이 싫다고 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야만 하는 상황이 무척 버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팀 점심도 회피하고, 팀 수다 시간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배려해서 말을 걸어줘도 싫고, 말을 안걸어줘도 싫다고. 신변잡기적 수다를 떨 때는 그리도 열정적이면서도, 정작 생산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자리에서는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의견 표명을 하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다고. 선생님은 ‘나는 부적응자구나’라고 생각하고 덮어두고 치워버리지말고, 어떤 지점에서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지, 어떤 요소가 나의 불만족감을 건드리는지를 다음 한 주동안 곰곰이 생각해서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물으셨다. 나는 그들을 ‘유능하고 따뜻한 사람’들로 표현했는데, 유능함을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할 말을 조리있게 할 줄 알고, 따뜻하게 마음을 쓸 줄 알고, 열정을 갖고 있으면서 통찰력도 깊이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내 상상 속 그들은 너무 유능해서, 어느 직장을 가더라도 너무나 잘 해낼 사람들 같다고, 근데 그들이 사라지면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너무나 두렵다고 말했다. 내가 좋게 생각하는 이유를 언어로 옮겨보는건 처음이라 낯설었다. 내가 지향하는 인간상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고, 갑자기 그들이 보고싶기도 했다.
내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안정적 직장, 본받을만한 사람들, 취미생활을 영위할 여력, 등등) 자꾸만 재미가 없게 느껴지고 만족스럽지가 않다는 이야기도 했다. 앞으로의 시간들은 이제 그걸 조금 더 깊이있게 탐구해보자고 하셨다. 더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갑자기 많은 이야기를 나눴더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이 뭉텅이로 사라진 느낌. 되게 좋은 시간이었는데..
여러모로, 왜 진작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시간이었다. 나한테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나보다. 다음주 상담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내 안에 하고싶은 말이 너무나 많이 쌓여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