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습 1253일차 - 아물어가는 중입니다

6월 1주의 상담일기




- 조금은 우울한 한 주였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 내 낯빛을 잠시만 살펴도 나를 알아챈다. 먹구름인지 햇살인지, 밤인지 낮인지.


- 다른 사람들의 한계를 존중한다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피하던 선배와 밥을 먹기도 하고, 조금 더 웃어넘기기도 하고 그랬다고. 애를 많이 써서 힘들었구나, 하셔서 마른 웃음을 지었다. 그정도로 애를 썼는지 모르겠어서다. 그냥 되는대로 지낸 것 같기도 하고요, 덧붙였다.


- 화가 났었던 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 연관된 사람 그 누구도 나서서 문제를 바로 잡을 생각을 않고 있는 상황이 답답해서 그만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고 말았다고. 평소의 나는 티를 내지 않고 일단 착수하는 성격이었고, 그것이 나를 이롭게도 괴롭게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관성대로 말을 아끼고 그냥 착수할 수도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조금의 짜증을 냈고, 그걸 ㅅ선배는 알아챘고, 후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그래서 괜히 표출했다, 어리석었다, 하는 마음이 들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고 했다.


- 왜 어리석었다는 마음이 들었나 이유를 캐다보니, 내가 ㅅ선배에게만큼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구나’하는 것을 파악당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데에 다다랐다. ㅅ은 평소 사람의 특성을 누구보다 빨리 캐치하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그녀와 대화를 할 때에도 자주 나오는 말이 ‘00씨는 00한 사람인데,’ 같은 문장.
그녀를 경계하던 시기를 지나고, 업무를 나눠하며 조금씩은 가까워지는 상태였는데, 그녀가 나를 특정한 모습으로 파악하고 규정지어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던가보다 나는. 그간에 쌓아온 이미지는 어른스럽게, 한발 앞서서 다독여가며 일하는 이미지였던 것 같은데, 이번에 짜증냈던 그 일이 그것을 허무는 것 같아서 불편하기도 하고.. 그녀가 새로이 파악한 나의 모습을 평소 다른 이에 대해 이야기하듯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던 것 같다.




- 선생님은 사람에 대해 빨리 규정짓는 것은 그 사람의 특성인 것이지, 내가 특정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라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내버려두고, 나는 내 선택을 하면 된다고.




- ㅅ에게뿐만 아니라 모두의 앞에서, 나는 오랜 시간동안 흐릿한 사람이고 싶어했던 것 같다. 또렷한 사람이 되면 겪게 되는 외로움을 그만 겪고 싶었고, 두루 어울리기 위해서는 흐릿한 편이 낫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느끼는 나는 제법 또렷한 사람이라서 흐린 상태로 지내는 것이 오히려 힘겨웠을 거라고 했다. 선생님과 함께 지내온 시간만 돌아봐도, 나는 호오가 분명하고 하고자 하는 바를 정하면 끝내 하고마는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제는 내 앞에 더 넓은 세상이 열리고 있고,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도 많아질 것인 만큼 나의 호오에 귀를 잘 기울이고 정말로 택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택해나가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도 무의식 중에 나는 나를 살리는 선택을 해왔을 것이라고. 그러니 여기까지 닿는 이 먼 길을 잘, 헤쳐온 거라고. 지금부터의 선택도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런 결정을 내린 나를 마음껏 신뢰하면 된다고. 설사 그 선택이 잘못된다고 해도, 과거의 그런 선택을 한 나를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 다음에 오는 선택의 순간을 더 잘 보내면 되는 거라고. 과거의 나도 내게 주어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고.




- 선생님은 다행인 것은 나의 선택지가 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고 하셨다. 좋은 의미로. 작년의 나는 적게는 다섯개, 많게는 열개의 보기를 상정하고서 그 사이에서 하나를 택하기 위해 끙끙 앓는 모양새였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보기를 단순화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고, 지금도 1)갑갑한 상황에 대해 표출하며 일을 할 것 인가 2)나를 갉아먹더라도 이전처럼 꾹 참고 그냥 버틸 것인가 이 두가지의 보기만 있었다고. 내가 본능적으로 좋은 것, 이로운 것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라서 방금의 고민에 대한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흐릿한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는 또렷하고,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흐릿하다. 인간은 모두 모순되고 불완전한 존재이고, ‘또렷한 사람’이기 위해서 늘 일관된 선택만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내 어깨에 놓인 부담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1의 선택을 했다가도, 2~3년 뒤의 나는 2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 한다 해서 나쁜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냥 마음과 생각이 변한 것일 뿐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래서 언제나 옳고 좋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나보기로 했다. 잘못 택하면 뭐 어때,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라면 그냥 그걸로 된 것이다. 미더운 내가 내린 나의 선택을 믿어보기로 했다.




- 지금까지 파악하기로, 내 코어를 크게 흔드는 것은 1.인간에 대한 회의 2.버려진다는 감각이다. 모두 기대와 실망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이다. 쉽게 왔다 사라지는 것에 대한 오랜 상처가 있는 것 같은데, 아직 깊이까지 모두 아물지는 못한 것 같다.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유는 아직 저렇게 공고해진 배경의 일이 나도 채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것들을 조금 더 더듬어 나가보자고 하며 마무리했다.



- 최근 들어 업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갈등이 되는 순간들을 많이 맞이했는데, 유독 막막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내가 그러한 순간들을 ‘어쩔 도리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택권이 없이, 그냥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 또한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냥 내가 하나를 선택하고, 취하고, 끝나면 된다고 생각하니 막막함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한 주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다음주에는 큰 맘 먹고 등록한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경험을 쌓을 예정이다. 설레기도, 두렵기도 한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기쁘다.




- 선생님이 성과로 느껴진다고 기뻐했던 부분은 인사 이동과 관련한 부분이었다. ㅎ선배가 떠나는 것을 상상하다 문득, 이번에는 내가 떠나는 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차라리 남겨지는 쪽을 택했고, 누군가 떠나가는 상황을 애달파하고 견디기 힘들어했는데 처음으로 내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어쩌면 스스로 변화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을 했더니 선생님이 놀라운 성장이라며 반가워하셨다. 이전보다 내가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보인다고 하셨다. 이전에는 작은 변화에도 크게 흔들렸다면, 이제는 다른 팀으로 옮겨지는 두려움이나 구성원이 바뀌는 변화에 대한 서글픔이 훨씬 덜한걸로 느껴진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러하니, 1년 사이 나에게는 제법 많은 변화가 있었나보다. 그래서 그냥.. 인사이동 문제에 있어서는 가면 가는거고 아니면 마는거고, 그냥 지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기로 정리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 일년 새 조금 더 단단해지고, 부지런히 새 살을 틔우고, 조금 더 미더워진 나를 칭찬해줘야겠다. 기특한 나. 아물어가는 시간이란 정말 좋은 것이다. 그 시간을 내가 내 스스로 나에게 쥐어주고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