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새해 다짐이 아니다

• 닮고 싶은 행보를 힘차게 이어나가는 사람, 느린 순간은 있었을지언정 한순간도 무뎌졌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사람 - 예컨대 이슬아, 요조, 장혜영, 정혜윤, 황소윤 같은 - 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당신은 지치지 않느냐고. 나날이 새롭고 진보된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이 고단하거나 슬프거나 부담스러워서, 도망치거나 숨고싶은 날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았느냐고. 그럴 때에는 어떤 마음을 먹었냐고. 어떤 마음을 먹고 스스로를 세우고 다독였느냐고. 그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던 이유는 아마도 스스로 더 나은 내가 되는 일, 고작 그것이 때로 고단하고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슬아의 강연을 갔던 날에도 목끝까지 질문이 차올랐지만 하지 않았다. 대답을 이미 알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스치지 않았을 수도 있으리라는 바보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나는 이슬아 - <가녀장의 시대>와 장일호 - <슬픔의 방문>을 읽으며 그 답을 찾았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그녀들의 발자욱이 ‘나’로부터 확장된 파장이라는 것이다. 두 여성은 가장 거추장스럽고 가장 지독스러운 경험으로부터 확장되어 나간다. 싸우고, 아물고, 새로운 기억을 씌워가면서 타인에게 한발짝 가까워진다. 내가 해야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너무나 익숙하여 특별한 재료로 느껴지지도 않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잘 말할 수 있고 가장 잘 체득하고 있는 것,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에게 구질함과 상처와 번뇌를 준 것. 그것이 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꼭 해답을 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가녀장의 시대>도, <슬픔의 방문>도 특정한 어떤 것을 해답이오,하고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애증의 어떤 것을 존중하면서도 슬기롭게 혜안에 다가가는 방법을 잠자코 보여줄 뿐이다.

• 새해 첫 노래가 한 해를 가닥잡을 수 있다고 믿어본다면, 새해 첫 책도 마찬가지이겠지. <슬픔의 방문>은 작년 연말 무렵 들여놓은 책이었다. 해서 새해 벽두부터 읽게 되었으나, 노골적으로 슬픔이 적셔졌을 것 같은 제목의 책을 새해 첫 책으로 삼는 것이 주저되기도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나의 우려는 기우였으며, 새해맞이 책으로 더할나위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나의 슬픔과 무거움과 열등감을 연료삼아 더 따뜻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이고 빛이 필요한 다른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새해 첫 노래로 들은 것은 ‘불티’였다.) 나의 한자 이름은 '받을 수'를 쓴다. 빛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름 뜻을 묻는 일곱살 나에게 할아버지는 어디서든 빛을 받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고 자랑스럽게 해석해주었었다.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던 이십대의 나는 내 이름이 수동태라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스스로도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할아버지는 왜 ‘받는’ 이름자를 지어줘서, 이렇게나 빛을 받을 때를 목말라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인지, 하릴없이 이름 탓을 했다. 삼십대의 나는 비로소 이렇게 재해석한다. 빛을 받는 주체는 어쩌면 내가 아니라 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자그마한 빛이라도 절실히 필요한 어떤 이에게 빛이 되어 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자고. 그렇게 되기 위해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해볼 것이다. 지치고 도망치고 숨고싶은 날이 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하면 된다. 새해 소망을 리스트가 아닌 줄글로 써보는 2023년의 두번째 날. 이건 단지 새해 소망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