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rden in the air🌿

4.15
어젯밤, 충동적으로 책을 잔뜩 샀다. (매년 이런 책 쇼핑이 1년에 세차례 정도는 있는듯하다.)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맛난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를 발견해 마음에 드는 아침을 먹고, 재즈가 흐르는 카페에 앉아 어제 산 책을 읽고 있다. [평일도 인생이니까]라는 책.

익숙해진 집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를 꿈꾸는 부분에서나, 여행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쓴건가’ 할 정도로 공감이 되었다.


‘
하지만 긴 여행에는 다른 호흡이 필요했다. 부지런히 다니다간 금방 에너지가 바닥날게 뻔했고, 당장 돌아갈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내일에 대한 계획이 그리 필요하지 않기도 했다. (...) 처음엔 ‘그래도 되는구나’ 하는걸 알았고, 나중엔 ‘그래보니 좋구나’ 하는걸 알게 되었다.
‘


김신지의 말처럼, 나도 나를 겪어봐야 안다. 많지 않지만 소중했던 몇차례의 여행을 거치며 알게된 ‘여행하는 나’는 서울에서의 일상과는 다른 문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2주 가까이 되는 포르투갈 여행이 무척 좋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내일 모레 다시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먼 여기 이곳까지 왔기 때문에, 나의 가치 서열에서 가장 높고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일들로 나의 시간을 채웠다.


수도원의 내부쯤은 악착같이 보지 않아도 좋았고, 실패할지라도 궁금했던 메뉴를 시켜보는 것이 좋았다. 아침 공원에서 햇살을 잔뜩 머금으며 요가도 해보고, 어떤 날은 멋들어진 브런치를 즐기는가하면 어떤 날은 숙소에서 장을 봐온 재료들로 아무렇게나 휙휙 만들어 먹기도 했다.

지옥철을 연상케하는 트램을 의무감으로 굳이 타보는 일 따위는 가볍게 접어두었고, 특별한 감상을 주는 장소에서는 오래도록 그 감정을 지켜보기도 하였다.
좋았어 포르투갈. 좋았다 그때의 나.


‘여행은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포르투갈 여행의 기억이 오래도록 나를 지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에서 열흘 남짓을 ‘닮고 싶은 나로’ 살아낸 덕에 말이다. ‘그래도 되는구나’하는 것도 알았고, ‘그래보니 좋다’는 것도 알았다.

포르투갈 여행을 통해, 생각만 해왔던 나,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나를 현실의 나로 바꿀 수 있었다.
수많은 DOs와 DON’Ts를 잊고, 나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순간들을 머금고, 내게 소중한 것들을 가까이에 두는 그런 삶. 그리고 그것이 실현가능하며, 생각보다 더 쉬울 수 있다는 것.

포르투갈 여행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그런 것이다.

유라-세탁소

아주 어릴적부터 나는 요약이라는걸 싫어했다.

글쓰기 시간이건 교과목 숙제건 할 것 없이 요약하기가 주어지는게 도대체가 싫었다. 이 글 속에 재미난 정보가, 생동감 있는 표현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떻게 최소한만 가려내라는거야. 물론 어른들은 늘 시간이 부족했고 어린이들은 원치 않더라도 앞으로 허겁지겁 시간 부족을 겪어나갈 것이기 때문에, 재빨리 요지를 파악하는 것은 장차 어른이 될 이가 수행할 중요한 미션 중 하나인듯했다.

아무리 싫어도 어쩌겠나. 꾸역꾸역 요약 과제들을 해내긴 했지만 세상에는 쉽게 축약되어지지 않는 말들도 있었다. 주요 문장은 아니지만 어떤 한 줄이 아니면 전체의 질감이 살지 않는 글도 있었고, 시처럼 이미 아름답게 정제되고 함축되어 더이상 줄일 공간이 없는 문장도 있었다. 질감이 없는 말과 글은 나에게 와닿지 못했다. 무엇이 되었든 요약된 버전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문장이 더 좋았다.

그렇게 자라온 탓인지 나는 사람을 대할 때에도 자꾸만 크기와 부피보다는 밀도와 무게를 신경쓰게된다. 아끼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담뿍 담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건 내가 시간이 많거나 마음이 많거나 에너지가 넘쳐서가 아니다. 요약본만 전하기에는 인생은 너무나 짧고, 소중한 당신과 나는 너무나 유한하니까. 마음을 다하는것이 힘에 부쳐 선택과 집중을 해야할 때가 와도 언제나 조금 더 촘촘하고 조금 더 묵직한 쪽을 택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마음이 한 단어로 쉽게 축약되어지는걸 보게 되면 영 마음이 좋지 않다. 당신에게만큼은 쉽게 요약되어지지 않는 마음이길 바랐는데. 어떤 것도 빼고 덜어낼 수 없는, 밀도 있는 마음이길 바랐는데. 대충 허투루 포장한 마음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눌러담은 마음이길 바랐는데..

많은 경우 나는 마음을 다한 쪽에 가까워서 그게 후회되거나 되돌리고 싶은 적은 많지 않았다. 못해준 것이 많은 쪽이 오히려 더 후회할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한 단어짜리 평가를 받아든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울적하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런 상처를 받기 싫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별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요약하는 사람이 되는걸까.


“
그래서 나는 소설 속의 인물 은섭에게 이 말을 주고 싶었나 보다.
“그 말 그대로야. 항상 너한테는.”
은섭이 사랑하는 해원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은 이였다. 해원은 겨울밤 뒷산 오두막으로 그를 찾으러 가다가 길을 잃는데, 은섭이 그녀를 찾아서 함께 산을 내려가려 하자 순간 오해한다. 그녀가 오두막에 가는 게 싫어서 그런 거냐고. 그의 공간에 들여놓지 않으려는 것 같다고. 은섭은 해원을 감싸며 말한다. 지금 오두막은 춥고, 그게 유일한 이유라고. 그 말에 다른 뜻은 없다고.
“

어디선가 이 글을 보고 그 말 그대로인 마음을 주고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말로도 줄여낼 수 없는 마음. 어떤 표현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 마음 그대로인 마음을 주고싶다. 그리고 받고싶다. 전자는 나의 몫이지만 후자는 너무나도 어렵네. 믿음은 이렇게나 순진하고 실망은 이렇게나 잦다.

갑자기 더위가 훅, 찾아왔다.
어느새 한낮 기온이 28도에 육박하네. 아직 5월 초인데.
여름마다 더위로 끙끙 앓으며 지내는데도, 돌아보면 모두 청량한 기억뿐인 것 같다. 기억이 미화되는걸까. 더위 같은 힘든 기억은 쉽게 휘발되고 좋았던 기억은 천천히 가라앉아 남아있나보다.

선선한 저녁 날씨는 나의 최애. 풀벌레 우는 초여름의 날씨를 고등학생 시절에도 좋아했긴하지만.. 나의 몸과 마음에 선명하게 각인된건 스무살 이후의 초여름밤들.
예쁜 캠퍼스를 가진 대학을 다닌 덕에 그 시절의 기억이 너무 좋다. 띄엄띄엄 조명이 켜진 운동장을 지나고 초록초록한 길을 걸으면서 많이 웃었지. 그래서인지 그맘때의 날씨를, 그때의 온도를 마주치면 무방비 상태로 랜덤한 기억의 조각들을 만나게 된다.

길고도 짧았던 연휴의 마지막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좋아하는 다기에 녹차를 우려먹고, 기름지지 않은 점심을 먹고, 라즈베리 밀크티를 맛보며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노을을 보며 잠깐 걷다 여름맞이 패디도 받았다.
패디를 받으며 하루키의 1Q84를 읽었다. 창문 밖으로 한낮의 열기가 가신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뜬금없이 1Q84를 두고 ㅊㅇ랑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웃겼다.
책이 출간된지 얼마 안됐을 때였나, ㅊㅇ가 “일큐팔사 읽었어?”하며 묻길래 “아니, 그거 아이큐팔사 아녔어?” 심드렁하게 답했더니 “일큐팔사야” 대답하던 ㅊㅇ.
- 그래? 아이큐팔사인줄. 왜 일큐팔사야?
- 뭐라더라, 1984에서 ...(후략)

그 뒤의 대화는 떠오르지 않는데 그냥 뻘하게 저 대화가 떠올라서 피식 웃었다.

AA옷들이 유행하고, 한창 미디어교육 레포트를 쓰던 6월의 밤도 떠올랐다. 장미가 한창 피는 계절이었고, 또 뭔 이상한 놈 때문에 맘 썩이는 와중에도 열과 성을 다해 그 과제를 완성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고민하며 써내려간 레포트라 아직까지도 어느 길에서 어떤 문단을 고민했었는지가 기억난다.
자주 지나다니던 외대 앞 나무 계단, 그 앞 사거리, 동안교회 뒷길, 다 너무 그립네. 그러고보니 대학 시절의 기억은 가을학기보다 봄학기의 기억이 더 강하게 남은 것 같다.

여러 기억이 묻은 골목 위로 비교적 최근의 기억도 덧씌워져있다. 이 기억들도 여러차례 여러 계절들이 지나고 나면 아픈 것은 휘발되고 좋았던 것만 남게 될까? 뭐 썩 아프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많은 것이 휘발될까. 언젠가 피식 웃게될 기억으로 남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