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습 1515일차 - 외로워서 자란 시간

•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빈집에 앉아 보낸 그 시간이 나의 어느 부분을 키웠으리라고. 덕분에 나는 무엇인가를 ‘그냥'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골똘히’ 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외로움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시간이 분명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나는 그때 충분히 혼자였다. 충분히 외로웠고, 충분히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 시간은 결국 의미가 있었던 것 아닐까. 충분히 외로웠기 때문에 가끔 함께하는 시간들, 사람들이 고마웠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보내는 시간만 귀하게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나하고 있는 시간도 귀하게 써야 한다는 걸 배웠다. 외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외로웠으므로 ‘나의 이 외로움을 소중히 여겨야지' 생각했다. 사람은 그렇게 혼자와 함께 사이를 건강하게 가로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 <평일도 인생이니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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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20의 일기 - bgm은 백예린 antifreeze

• “네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시간은 언제야?”

 

• 얼마 전 친구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떤 시간을 답해야하나, 가장 마음이 고되었던 시간? 아니면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시간? 고민 끝에 나는 2012년과 2016년을 이야기했다. 두 시간을 관통하는 단어가 무얼까 생각했는데, 그건 외로움이었다. 고대하던 일을 이뤄내는 결과를 얻기 직전의, 동이 트기 직전의 그런 시간들. 2012와 2016년의 나는 아직 내게 오지 않은 것, 그러나 언제 올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을 계속하여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 누구도 아닌 나와 가장 오래 지내야 했고, 나 아닌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무척이나 외로웠다.

 

• 그때의 나는 나의 하루를 살피는 것에 매우 서툴렀기 때문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알 수 없는 일정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기 일쑤였다. 끼니 때가 전혀 아님에도 배가 고파지면 그냥 대충 떠오르는 것을 먹고, 의욕에 가득차 며칠간 무언가에 매진하다가도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모두 놓기도 하고. 이따금씩은 지금 상태 이대로 - 취업도 하지 않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 무의 상태 그대로 - 화석이 되어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뒤로 ‘내가 화석이 되면 누가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할까’, 같은 생각들이 느린 구름처럼 지나갔다.

 

•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이밖에도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나에 대해 발견하고, 귀납적 결론에 이르게 된 것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1)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쉽게 나를 방치한다는 것(끼니, 집의 정리 상태 같은 것들.), 2)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한다는 것, 3) 너무 버거운 일 앞에서는 정말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기도 한다는 것, 4) 결과가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그 과정이 나를 갉아먹고 손상시키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한 감각이 본능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그야말로 외로워서 자란 시간들이었다.

 

• 지금의 나는 혼자서도 나를 위한 끼니를 지어먹을 줄 알고, 손 하나 꼼짝 않고 싶어도 눈 딱 감고 화장실 청소를 해치워버리고서 뿌듯해하기도 한다.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이 찾아와도 어르고 달래어 사탕 하나 쥐어 보내는 힘이 생기기도 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은 조금씩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일과의 관계 설정도 전보다 더 요령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그렇겠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연인과 시간을 만끽하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모드 전환을 하여 나와 힘껏 잘 지내보기도 한다.

 

• 언제를 지우고 싶냐는 질문에 퍼뜩 떠오른 시간이긴 하지만 막상 2012년과 2016년만 블록 설정하여 정말로 지워버린다면, 나는 전혀 다른 결의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 더 좋을지 안 좋을지는 알 수 없지.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나를 더할나위 없이 좋아하니까 그 시간들을 싸그리 지워버리지는 않기로 마음 먹었다. 천천히 하나하나 쌓으며 더디 배워온 시간들을 부러 잊어먹거나, 없던 것으로 치부하지 않기로. 나와 지내는 시간도 윤을 낼 줄 알고, 함께 보내는 시간도 영롱하고 단단하게 빚을 줄 아는 나로 자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2022년의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