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러니까, 왜 버리기로 했냐면

이것은 글로 쓰는 비포 애프터

 

 
25년, 수정과 재헌은 그 집에서 자그마치 25년을 살았다. 중간중간 집을 비운 채 다른 지역에서 지낸 기간도 있지만, 대략 3년 남짓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둘의 역사는 모두 그 집 안에서 일어나고 얽혔다. 여기서 말하는 그 집은 9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이다. 그 집에는 방이 네 개, 화장실이 두 개 있고, 가정을 이룬 베이비붐 세대를 겨냥하여 지어진 아파트답게 큼지막한 거실이 있다. 거실 옆으로는 산이 보이는 베란다, 이어지는 면에는 맞은편 단지가 보이는 ㄱ자의 주방이 있고 그 한 편엔 길쭉한 다용도실이 있다. 재헌의 부모님이 귀한 것이라며 해다 넣은 장과 화장대 같은 오래된 가구부터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27개월이 된 아기가 여기저기 남겨놓은 아기상어 장난감까지, 집 모퉁이 곳곳에 신구가 공존한다.


큰 자식은 열일곱부터 나가 살았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방학이니 휴학이니 때마다 내려와선 집에서 제일 큰 제 방을 버젓이 써놓고서는, 직장인이라는게 당최 뭔지 이제는 명절이 아니면 통 얼굴을 들이밀지도 않는다. 작은 자식은 제 언니와 달리 고등학교를 시끌벅적하게 다녔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가장 먼저 어엿한 아이 엄마가 되었다. 솜씨좋은 살림꾼이 된 것은 물론이다. 막내는 아직 그 집에서 먹고 자는 것 같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연구실과 헬스장에서 보내므로 ‘그런 것 같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그마저도 얼마 후면 취업을 해 집을 나가겠지만.


자식 둘이 본격적으로 독립해 나간 첫 해, 수정과 재헌은 둘의 방을 정리하지 않았다. 서툴고 엉성한 독립자들이 수시로 집을 찾은 탓이다. 어느 때에 다시 올지를 알 수 없었으므로 수정은 방을 다른 용도로 바꾸지 않았고, 재헌은 그들이 언제 들이닥치든 평소처럼 잘 수 있도록 자식들의 침구를 소독하고 주름을 깨끗이 펴두었다. 한 두 해 정도면 없어질 리추얼인 줄 알았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났다. 12년은 엉성했던 독립자들이 제법 구색을 갖춘 아마추어 독립자로 거듭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리추얼은 그대로 남았다. 여전히 재헌은 서울에 나가 사는 딸이 내려오는 날에 맞추어 침구를 말끔히 정돈해둔다. 딸이 즐겨 읽던 책과 손때 탄 물건들을 그대로 둔채로, 그 주변을 쓸고 닦는다.


그 집에서 수정과 재헌이 가장 즐겨 앉는 공간은 거실이다. 가벼운 브런치를 먹고 유퀴즈를 보는 주말, 네살짜리가 놀러오는 오후, 퇴근 후 노곤하게 보내는 저녁, 모두 거실이 주 배경이다. 그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안방이다. 그 외의 공간은 모두 자식들의 짐이 덕지덕지 놓여있다. 큰 자식과 작은 자식이 남긴 온갖 모양새의 역사들을 수정과 재헌 둘이 그러모은 채로 산다. 그 모습을 선명히 그리고자 한다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올려야 한다. 자식들이 남긴 방대한 기억의 조각들이 둘에게 방치하듯 던져진 채로 세월이 지났다. 수정이 어떤 수정이었는지, 재헌은 어떻게 재헌인지조차 잘 안보이기 시작할 때 자식 중 누군가가 말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그래서, 삼남매가 버리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