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

 

 

• 이른 새벽 기차를 탔다. 새벽 시간은 정말 적금 같은 시간. 소중히 쌓아두었던 것을 기쁘게 쓰는 것 같은 그런 시간. 김동률과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울에 왔다.
• 요즈음 나의 가장 큰 숙제는 집 문제 해결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엄마가 슬쩍 거금을 건넸다. 아빠도 모르게 건네는 돈. 엄마는 늘 내가 걱정이란다. 무엇이든 나에게 흔쾌히 쥐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어버이날 맨몸으로 내려와 큰 돈을 받아가는건 나니까, 미안해야하는건 오히려 내쪽인데.

 

• 가난하게 사랑을 받고만 싶다. 언젠가 노랫말로 접한 문장. 무슨 의미인지 그냥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많이 받든 넘칠 것이 없으므로 흠뻑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 집에 다녀오면 모든 것이 넘쳐 흐르다 갑자기 미지근해지는 느낌이라 늘 적응이 안된다. 집에 다녀온 날의 오후 반나절은 그런 마음 상태로 보내게 되는 것 같다. 그 시간 사이를 어떻게 견디는가가 나에게는 항상 과제다. 난이도는 매일 다른.

 

• 오늘의 나는 집안일을 도피처로 삼았고, 계절이 바뀐 옷들을 바꿔넣고 안 입는 옷을 잔뜩 버렸다. 엄마가 2011년도인가에 사준 옷도 버렸다. 케이프 코트와 청바지. 겨울이었고, ktx 탑승을 앞두고 있었고, 아빠도 동생들도 모르게 나한테만 살짝 사준 옷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마도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어 함께 방을 알아보고 내려가던 날이었던 것 같다.

• 케이프 코트는 그해 그리고 그다음 겨울까지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녔다. 입을 때마다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디자인 자체도 공주였지만, 엄마와 백화점을 돌며 함께 고른 옷이었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너무 튀어 몇해가 지난 후부터는 자주 입지 못하게 되었지만. 입지 않아도 매번 아껴 보관한 옷이었고 기숙사에서 자취방, 지금의 집에 오기까지 여러차례 이사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한번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옷이다. 청바지 또한 오래도록 버리지 않았다. 가을 겨울이 오면 늘 꺼내 입었는데, 2016년 이후로는 한번도 입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역시 이사를 할 때마다 짐 속에 고이 챙겨넣었던 옷.
• 오늘에서야 드디어 버렸다. 산지 10년이 넘은 걸 떠올렸고, 입지 않은지도 5년 이상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유행 지난 다른 옷들은 그사이 많이 버렸는데, 그 와중에도 고집스럽게 이 두 벌만큼은 버리지 않았던 이유를 곱씹어 보았다. 엄마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라 그랬나보다 하는 결론에 닿았다. 혼자서 타지 생활을 할 딸이 기특하기도, 안쓰럽기도 하여 엄마가 큰 마음 먹고 사준 옷. 스스로의 옷에도 들이지 않을 거금을 못난 딸을 위해 거듭하여 쓰는 것이 마음이 아프고, 한편으로 좋았다. 그래서 그 낡은 옷 두 벌을 십년을 넘게 지니고 있었다. 애착인형처럼. 낡은 옷이더라도 엄마의 흔적이 절실히 필요한 시간을 보내왔구나 나. 혼자서기의 시간은 날마다 외롭고 낯서니까. 그 안에서 엄마의 마음이 묻어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고 싶었나보다.

 

• 울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상담 없이도 몇 달을 지나왔다. 맹구와 헤어진 후로는 엄마아빠를 만나는 것도 괜시리 어색해지곤 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씩 그 감정이 옅어지는 것을 느낀다. 전보다는 덜 어색한 느낌. 그런데 정말이지 엄마아빠 생각을 하면, 금세 눈물이 차올라버린다. 여전히 혼자서기는 어렵고 날마다 신생아가 되어 집을 나서는 기분이다. 대학생 내내, 집에 다녀와 서울역에서 기숙사까지 가는 길을 그렇게 사무치게 외로워했었는데 서른둘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서울역에서 집에 오는 길이 그렇게 외롭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그 두 벌의 옷이 없어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 물건 그 자체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건은 물건이고, 애착은 애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