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레슬리 컨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레슬리 컨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에, 손바닥만한 메모장에 길을 오가며 든 생각들을 모두 남겨두었었다. 그 중 하나가 화장실에 대한 고찰이었다.

필기 시험장을 갈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나의 자리와 화장실 간의 거리 및 동선을 가장 먼저 살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에 비해 여자는 이용자 1인이 필요로 하는 면적이 훨씬 넓은데도, 어느 학교, 어느 회사 건물을 가든 화장실은 칼로 자른듯 늘 동일한 면적이었고, 당연하게도 시험 중간 쉬는 시간마다 줄줄이 늘어선 여자화장실 줄을 조마조마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어쩔때는 시험 자체보다도 쉬는 시간 안에 제때 볼일을 마치고 착석할 수 있는가가 더 긴장되는 문제로 다가오기도 했다. 게다가 구식 변기로만 이루어진 화장실이 있는 시험장은.. 말할 수 없이 긴 화장실 줄을 맞닥뜨려야 했다. 몇몇 시험장에서는 방송으로 어느 층 화장실이 여유있는지를 알려주거나, 시험장에 제시간에 착석하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기도 했다. 어느 정도 취준 짬바(?)가 찬 이후에는 그런 방송이 없어도 잽싸게 전혀 다른 층의 화장실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촉박한 쉬는 시간의 함정을 극복하곤 했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는 대부분의 건축가와 도시 계획가가 남자- 여자들이 화장실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필요로 하는지 고려하지 않는 -라는 사실이다.<(대부분이) 시스젠더 남성인, 공공건물과 공공장소에 공중화장실을 설계해서 설치하는 사람들은> 생리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무지하다>라고 로는 말한다. “. 사용자가 화장실 안에서 - 생리 중인 여성, 긴 치마를 입은 여성, 아이를 동반한 여성, 다리가 불편한 여성 등 수없이 많은 사용자의 모습 - 어떤 필요를 느끼는지 상상할 수 있는 도시 계획가가 있었다면 화장실의 모습은 어땠을까.

(지리학의 영역은 아니지만 이 책의 문제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비슷한 생각을 싱크대를 보면서도 했다. 가사노동의 현장에 여성을 욱여넣어놓듯, 싱크대의 높이는 성인 ‘여성’의 평균 키에 맞추어 설계되어 있다. 성별 관계없이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재도 대부분의 주방가구가 여성의 평균신장에 맞춰져 있다. 반면, 자동차의 경우 ‘당연하게도’ 남성의 평균 신장에 맞추어 설계되며 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고리타분한 이슈 중 하나다.

'75㎏ 남성'이 운전자 표준? 성평등하지 못한 자동차 안전

 

생각해왔었던 이슈와 맞물리자 독서가 훨씬 더 즐거워졌다. 이 책을 계기로 페미니스트 지리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간과 건축에 대한 생각을 갖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도 생각났다.

정책 입안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향후에 성평등을 촉진할 것인지 저해할 것인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특히 이 문장을 읽으며 나의 업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인사팀에 근무하며 이런저런 규정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의 결정으로 만들어진 단어 하나가 좁게는 그와 연관된 규정, 넓게는 직원 개개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때로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고, 그때마다 내가 하는 고민은 이것이다. 나의 결정이 향후 회사가 나아갈 길을 견고하게 만드는가, 직원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그 둘 사이 어딘가의 오솔길을 내는가. 위 문장을 읽고, 결정의 순간에 곱씹어 볼만한 요소를 하나 더 추가했다. 나의 결정은 향후에 성평등을 촉진할까 저해할까.

저자는 공간을 물리적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한번에 해낼 수 있는 슈퍼 페미니스트 도시 계획가 같은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선택을 거듭할 뿐이다. 그 선택이 쌓이고 쌓여 더 나은 길에 이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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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 읽었던 문장들

• 도시는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 제인 다크(페미니스트 지리학자)
• 도시는 남성의 경험을 <표준>으로 삼음으로써, 여자들이 도시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고 어떤 일상 경험을 하는지를 거의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남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뒷받침하고 돕게끔 설계되어 왔다.
• 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어느 도로와 어느 구역을 우선으로 제설할 것인가에 관한 결정은 도시가 어떤 활동을 높이 평가하는지를 드러낸다.
• 누군가가 도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고, 도시와 관련된 자신의 권리가 생득권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누구고, 항상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자는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기존 사회의 차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기에 계급 간 격차의 좋은 지표다.
• 우리 몸은 공포, 괴롭힘, 폭력, 원치 않는 접촉의 모든 순간을 <기록한다>.
• 우리는 두려워하도록 사회화함으로써 여자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다른 형태의 배제, 분리, 차이에 대한 공포를 강요하는 시스템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 대안적 공간을 만드는 데는 끝없는 선택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