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노랑 다정

어린 시절 기억에 남은 엄마의 모습은 항상 따뜻하고 다정한 모습이었다. 엄마는 내 친구들의 엄마보다 젊었고, 상냥했고, 예뻤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엄마를 부러워했다. 엄마는 학창시절동안 무용을 해서인지 선이 곧았다. 엄마의 다정도 곧은데가 있었다. 어르신들에게나 아이들에게나 한번도 대충인 적이 없이 바르고 다정했다.

등교를 하려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걸어가면 늘 엄마가 따라나왔다. 신발을 신는 나를 뒤에서 다정히 바라봐주기도 하고, 손잡이를 슬쩍 잡아올려 잔뜩 넣은 책으로 가방이 너무 무거워지지는 않았는지를 살피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 가는 길이 싫지 않았다. 나의 편이 언제나 다정히 배웅하고 마중해줬으니까. 그런 배웅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말도 안되는 일을 겪어도 엄마가 마중을 나오면 잊혀졌다.

내가 고학년이 되고 엄마가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엄마와 나의 현관 인사 방식은 바뀌었다. 어떤 날은 엄마가 먼저, 어떤 날은 내가 먼저 집을 나섰고, 학교를 마치고 와도 엄마가 없는 날이 더 많아졌다. 곧고 다정했던 엄마가 선택한 소통 방식은 포스트잇이었다. 학교를 다녀오면 집은 적막했어도 여기저기 엄마의 목소리가 노랗게 묻어있었다.

현아, 냉장고에 전복죽 있어. 살짝 데우면 금세 맛있어질거야. 버스 내릴 때 아빠랑 마중갈게.

현아, 학원 가방 무겁더라. 오늘 책은 하나만 덜어내고 가자. 멋져 우리 딸~

현아, 저녁에 소나기 온대. 식탁 위에 작은 우산 올려뒀으니 챙겨나가. 예쁘길래 주려고 샀어.

어떤 날은 현관 거울에, 어떤 날은 냉장고와 식탁에, 어떤 날은 TV에. 적게는 하나, 많게는 세네개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엄마는 항상 나를 현아야 하고 불렀고, 포스트잇에는 엄마의 목소리가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그 다정한 쪽지들이 좋아서 나는 매일 포스트잇을 떼서 서랍 속 상자에 모아두었다. 내가 처음으로 모은 것은 연노랑의 정사각형 모양 다정이었다.

그 박스 덕에 나는 어떤 시절을 났다. 나의 귀퉁이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준건 그 노랑들이었다. 연필 끝에 묻은 다정을 알고 자라서인지 나는 커서도 글로만 전해질 수 있는 다정을 믿는다. 말이 나오는 속도보다 글의 속도가 언제나 느린 것이 좋다. 글이 쓰여지는 데에 시간이 든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고 나면, 그 글을 쓴 사람이 거쳐온 생각의 시간과,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 알맞은 말을 공들여 골랐을 시간까지도 훅 와닿는다.

모두가 이런 방식으로 응원을 건네고 위로를 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감사하게도 내 유년기의 추억은 잘 쓰인 다정에 대한 눈을 만들어주었다. 그런 방식으로 작동되는 사람을 발견하게 해준 것은 물론이다. 그 손끝에서 앞으로 어떤 글이 쓰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 손끝에서 쓰인 글은 영 다정하고 여물 것이며 누군가의 서랍에 오래도록 남으리라는 것이다.



- 어느 날 어떤 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