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여행

방랑벽이 도진 목요일. 일요일부터 월요일 단 이틀, 짧지만 억지로라도 여행을 다녀와볼까싶어 휴가원을 올리고 갈만한 곳을 찾았다. 고성에서 보았던 여유있는 풍경이 떠올라 고성행을 기획하다가, 그만 접었다. 이렇게 내킬 때마다 산으로 바다로 떠나다가는 몸도 지갑도 시간도 축날 것 같았다. 올해의 관심사는 지속가능성. 3월까지 줄곧 산으로 들로 쏘다닐만큼 쏘다녔다. 집에 붙어있었던 주말이 한 손에 꼽힐 정도이고, 꽃이며 눈이 유명한 도시들도 모두 다녀왔으니 말 다했지. 언제까지나 이렇게 다닐 수는 없고, 이제는 지속가능한 삶을 꾸릴 때가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부터 미니멀리즘에 꽂힌 한 선배는, 틈날 때마다 집을 쓸고 닦고 집안의 물건들을 몽땅 솎아내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남기는 연습이다. 그동안 미루어왔던 어려운 집안일도 스스로 해내고 있다. 조명을 달고, 전구를 갈고, 가구를 조립하고, 이런 것들. 이제는 이런 것도 스스로 할 줄 알아야죠. 나를 돌보는 건 결국 나잖아요. 선배가 남긴 그 문장이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왜 떠나고 싶었나. 새로운 하루를 꾸려보고 싶어서? 이질적 풍경을 보고 싶어서? 딱히 그곳만을 가고싶었던 곳도 아닌데, 왜 하필 여기가 아니라 그 곳에서? 새로운 곳에 간다해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나의 태도와 시선이겠지. 여행지에서의 내가 새로운 마음을 먹을 수 있다면, 지금 여기의 나도 먹을 수 있다.

여행 갈 마음을 접고서, 집안일을 시작했다. 집 여행을 떠날 준비. 눈뜨자마자 운동을 다녀와 빨래를 한바구니 돌렸다. 빨래가 마르는동안 고장난 베란다 수전도 엉성하게나마 고치고, 싱크대와 세면대에 남은 물때를 지웠다. 수도꼭지의 광을 내고 뽀송한 빨래를 다 개어넣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허기가 져서 집에 있는 재료들로 끼니를 챙겨본다. 오랜만에 사와본 아보카도가 메인. 불도 쓰지 않는 요리인데도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다보니 방랑벽이 조금 채워진다.

배도 채웠으니 지금부터는 정말 여행자처럼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비가 오길래 바스락거리는 바람막이를 하나 걸치고 나서서 익숙한 단지를 낯설게 걸어본다. 비가 떨어질 때마다 이파리가 통통거리며 튀어오르는게 새삼스럽게 새롭다. 산책의 끝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한아름 빌려왔다.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빌려오면 일곱권. 미니멀리즘에 대한 책 몇권과, 여행에 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그리고 정희진의 신간으로 가방을 채운다. 오후에는 쓸고 닦은 집에 친구를 초대했다. 쓸데 없는 이야기를 즐겁게 하고(양희은의 표현에 따르면 그럴 수 있는 친구가 정말 찐친이라는데) 평소에 가지 않던 좋은 식당으로 친구를 데려간다. 그윽한 맛의 저녁을 먹고 친구를 보내고나니 시간이 일러서 코노에서 좋은 날도 한판. 빗길을 걸어 숙소 같은 집으로 돌아와 조명을 켜고 낮에 빌려온 책을 읽으니 하루가 금방 간다. 평소에 쓰지 않던 워시로 샤워를 하고 새로운 향을 맡으며 잠을 잤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하루를 괜히 여행스럽게 보내고 나니, 어디도 가지 않고서도 새롭게 온전한 하루였다는 감각이 든다.

휴가를 낸 내일은 평일에만 아침 일찍 여는 아담한 카페를 들렀다가, 척추에 좋은 동작으로 구성되었다는 요가 원데이클래스를 들릴 예정이다. 선크림 하나만 슥 바르고 책 한권만 들고 가볍게 나서야지. 개운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며칠전부터 먹고싶던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나에게 피와 살이 될 공부를 할 요량이다. 그러면 정말로 여행지에 다녀온 것처럼 충전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출근하는 일상조차도 돌아가고 싶은 하루가 되겠지.

뭐든 손에 잡히지를 않는 것 같았던 이십대 후반에는 집의 상태가 삶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생각했다. 그 당시 삶의 규모에 꼭 맞는 괜찮은 집이었지만, 아무리 정리를 해도 어쩐지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를 않았다. 면접에 떨어지고 주눅이 들고 나에 대한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집은 쉽게 어지러워졌다. 청소기를 돌리는 간단한 집안일은 하루 이틀쯤, 그러다 나흘쯤 미루었다. 당연히 누구를 초대하는 것도 귀찮았고, 그냥 이런 나와 내 집을 보이기가 싫었다. 이제는 나를 가장 잘 돌보는 것은 나여야한다는 말의 의미를 안다. 엉망진창이었던 어제의 민낯을 개운하게 씻어내고, 가장 좋은 것을 해 먹이고 가장 편안한 쉼을 주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는 것. 나는 앞으로도 종종 집 여행을 떠날 것이다. 가장 자주 가는 여행지가 어디세요? 뉴진스의 하입보이요. 집이요!

호텔 대신 집에 체크인해보는 주말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