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주 일기와 상담일기11 - 몸과 마음의 검진

비슷한 색의 가운을 걸친 수많은 스몰사이즈와 미디움사이즈 라지사이즈들이 비슷한 색의 소파에 띄엄띄엄 걸터앉아있는 곳. 짧은 몇분 사이에도 수많은 이름들이 불렸다. 동시다발적 호명 사이로 휩쓸리듯 지나다니다보면 어느새 검진이 끝나있을터였다.
입고 왔던 (거의) 모든 것을 탈의하고, 위장마저 비운채로 대기를 하다보면 공허 그 자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개중에는 모든 것을 탈의하고도 베레모를 챙겨 쓴 사내도 있어서 웃음이 났다.) 신청한 검사의 종류에 따라 어떤 이는 구멍이 뚫린 바지를 입고, 어떤 이는 소변을 참으며 기다려야하는 것은 다르지만, 속을 비운채로 기다림을 견디어내야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나는 검진이 끝나면 무얼 먹을지를 고민하며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몸의 허기를 채우는 일이란 단순하고도 손쉬워서, 매력적인 선택지 중 어느 하나를 골라내기만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다. 반면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워야하나.. 이것만은 그리 단순하지도, 손쉽지도 않은 듯 하여 조금은 망연자실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종종 내가 지나온 날들이 원망스럽다. 거추장스럽고, 처참하다. 지나온 날들이 나를 '지탱'한다는 감각보다, 지나온 날들이 나에게 족쇄를 채우는 듯한 감각이 더 강하게 든다. 특히 모든 것이 여물어 결실을 맺는 계절이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허무의 감각이 크게 와닿고만다. 과수(과거의 나)의 그릇된 선택과 좌절의 순간들이 현수(현재의 나)가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현수의 착각일까. 현수가 과수를 미워하듯 미수(미래의 나)도 현수를 미워할까. 과수의 선택들이 현수를 갉아먹고 있는 걸까, 현수의 선택들이 과수를 빛 바래게 하는걸까.
자꾸만 나의 이름이 불리우는 통에 이 생각 저 생각을 띄엄띄엄 옮겨다녔다. 마음에 청진기를 갖다댔다면 아마도 정신없이, 그러나 조금은 느리게, 폴짝폴짝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10주 가까이 상담을 하며 큰 산을 두번 정도 넘은 것 같은데, 어제의 상담은 단연코 내 안의 가장 큰 봉우리를 건드린 느낌이다. 이제야 겨우 입밖에 낼 수 있게 된 터라 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고, 건드렸다고밖에 볼 수 없겠다.
내 과거들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다고, 어떤 굴레에 갇혀버린것만 같다고 털어놓았다. 구질구질한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왜 과거의 기억들이 '구질구질'로까지 기억되는지를 짚어보자고 하셨다. 캐고 캐다보니 꽁꽁 싸매두었던 엄마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은 내가 오랜 세월 엄마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엄마의 처지를 헤아리려 애써온 탓에 내 인생이 아닌 엄마의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고. 걸어온 길을 돌아봤을 때 온전히 내가 이룩한 것으로 생각이 드는 성과는 떠오르지 않고, 뭔가 다 애매하게, 꾸역꾸역 해온 것 같은 일들만 떠오르는 것은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모든 것을 잘 해내야하는 큰 딸, 큰 손녀의 역할을 너무나 세뇌받으며 자란 탓에 선택의 순간에 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다시 돌아간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나는 조금 더 소신껏 이야기하고 소신껏 택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수학 따위 안해도, 친구들과 가끔 싸우고 다시 화해한다고 해도 '나'로서 사는데에 하등 불이익은 없었을 것이고, 음악이든 미술이든 다른 무언가를 했더라도 소신껏 그 다음을 택할 수 있는 능력만 키웠다면 건강히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택하고, 나를 믿을 수 있는 힘을 조금 더 이른 날부터 길러왔다면 참 좋았겠다고. 그랬다면 현수는 조금 더 강하고 단단하지 않았을까 한다고.

 

선생님은 내 기억들이 전혀 구질구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자체로 저항의 흔적이고, 그 자체로 의미있고 장하다고. 아마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해보겠다고,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이 저항의 최정점을 찍은 때가 아닌가 싶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맞는 것 같긴 한데, 결국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풀린 나를 보면 무엇을 위한 저항이었나, 내가 옳다고 믿고 버틴 것이었는데도, 모두 다 그저 부질 없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뜻을 세워보겠다고 싸우던 시기가 정작 나에게 가장 큰 타격(몸과 마음의 타격)을 준 시기이기도 해서 과연 그게 옳았는가, 과연 그것이 나에게 이로운 일이었는가, 그냥 애초부터 그들의 뜻대로 하는게 맞았었나하는 생각에 썩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 시기는 힘들 수 밖에 없는 시기였다고 했다. 모두의 완곡하고도 강한 그 만류를 뿌리치는게 쉬웠을 리도 없고, 취업시장 자체의 혹독함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때의 힘듦은 복합적인 이유로 온 것이지, 내가 감히 저항을 해서 겪게 된 징벌은 아니라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세우던 뜻과 그들이 원한 바의 중간 그 어드메에 있을지라도, 그 과정은 내가 오롯이 일궈낸거라고. 내가 굴레에 들어간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굴레와는 미묘하게 다른 굴레에 있고, 앞으로 그 방향은 조금씩 바뀌어 갈것이니 현수를 걱정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고. 어린 날의 나를 본다면 꼭 안아주고싶지 않냐고, 왜 그랬는지 너무나 공감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구질구질하지 않아요, 거듭 강조하여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몇 차례를 울었다. 저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눈물이 그냥 났다. 가끔은 혼자 머리속으로 되뇌어 온 꼭 같은 말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것이 더 큰 울림을 줄 때도 있는 것이다. 버스 창밖의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걸까. 이렇게나 스스로와 세상과 몸과 마음과 싸워가며, 울고 웃어가며 사는걸까. 사는게 뭐라고. 생경한 온도의 밤공기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의 허기를 채워보려 몸을 움직이기까지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구나. 구질구질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까지 30년이 걸렸구나.. 몸의 검진 결과는 2주면 받아들게 될텐데, 마음의 검진은 무척이나 오래 걸리는구나. 깊이 모를 공허도 그 시간 속에 조금씩은 채워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