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7 귀한 대접을 받는 일

설렘은 빈틈에서 피어난다. / 팝송 playlist

 

 

• 명석한 생각,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배려, 무해하고 사려깊은 말투, 나한테만 보이는 다정한 눈빛, 손과 품의 온기, 재치있는 말 한마디. 오빠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틈틈이 드러나는 영롱한 마음.

 

 

• 지난 금요일에는 덤벙거리는 나 때문에 퇴근길 동선이 아주 복잡해져버렸다. 아침에 예매해둔 표를 환불한다는걸 새까맣게 잊었고, 기차는 이미 출발했고, 역 창구에 가야 환불이 된다는데 가장 가까운 역은 약속 장소와 반대 방향이고, 오빠는 이미 약속장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그냥 돈 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하필 특실을 예약해두었었고(ㅋㅋ). 어떡해야하나 순간 고장난 나를 오빠는 잠깐의 카톡만으로 알아차렸다. 내가 있는 곳을 파악해서 우리를 위한 새로운 동선을 짜고, 고객센터에 전화해 환불 가능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도록 역 창구까지 함께 뛰어주었다. 진짜 너무 힘들었는데, 오빠 덕에 그 모든 일화가 웃을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유쾌하게 지나가는 시트콤 에피소드처럼.

 

• 겨우 환불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는 진이 빠져서 음식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가까운 냉삼집을 가서 한숨 돌리고, 고기를 구워주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내 앞에 끌어놓아주는 오빠를 보고있자니, 안그래도 고생스러웠던 하루 끝에 더 큰 고생을 시킨 사람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더니, 그런 마음은 안 받는다고, 고마움만 이야기하자고 하는 그다. 야무지게 쌈을 싸서 맛있게 먹으면 그게 보답하는거야, 해서 그제야 안심이 되어 마음 편히 밥을 먹었다.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와 추적추적 빗소리를 들으며 오빠네 가족 이야기를 잔뜩 들었다. 유년시절의 풍경과, 부모님, 형제자매와의 일화들을 들으니 나에게 보여준 사진 속 해맑게 웃는 어린 얼굴이 떠올라서 웃음이 킬킬 나왔다. 학교 선생님에게 맞은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렇게 심지가 단단한 사람으로 자란게 기특하고 어여쁘다는 마음이 들어서 순간 눈물이 핑하려고 했다.

 

• 밥을 먹고 나올 쯤에는 비가 억수같이 왔다. 여름 장마처럼 아주 쏟아붓는 비였다. 계산을 마치고 일어선 그가 당연한 듯이 자신의 우산을 펴고 내가 그 속으로 들어오길 기다리고 섰는데, 그 모습에 심장이 욱신해버렸다. 비 안 맞게 자켓 안으로 손을 넣어, 해서 외투 속으로 오빠를 껴안고 한 우산을 쓰고 걸었다. 분명 둘이 쓰기에는 작은 우산이었는데, 자꾸만 비가 안으로 들이쳐서 옷도 신발도 다 젖어버렸는데, 넉넉한 품이 있으니 하나도 좁거나 축축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오빠의 코트를 옷걸이에 거는데, 왼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있는 걸 보고 마음이 뜨끈해졌다.

 

 

• 어제는 오빠표 집밥을 먹었다. 친구와의 약속 시간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든, 오빠는 나를 보러 온다. 와서 내 몫의 저녁밥을 차려주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쓰담쓰담까지 해준 후 약속에 가는게 토요일의 루틴. 오빠가 차려준 밥상만 벌써 다섯번은 되는 것 같다. 내가 한사코 사양하는 날에도 우리집에 오면 제일 먼저 하는 건 냉장고 속 재료가 뭐가 있나 살피는 일. 냉장고가 빈 날에는 장을 보러 집 앞 마트로 마실을 간다. 마음이 괴로워도 먹는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 나지만 (ㅎ) 혼자 먹을 끼니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따뜻한 일이다. 같이 장을 보고, 한쪽 손을 꼭 잡고, 마음에 드는 맥주까지 품에 안고 걸어오는 길이 참 좋았다.

 

•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잘 줄 수 있다고,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요즘이다. 귀한 마음을 받으니 나도 절로 그런 마음을 주고싶은 마음이 든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작고 예쁜 귤 같은 마음. 잘 간직했다가 마음이 시린 날 까먹을 수 있는 그런 기억이 매일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