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스럽게, 봄

 

 

 

1. 뒤늦게 더글로리를 정주행 중이다. 7화에서 동은과 여정이 나눈 대화가 좋았다. 여정은 동은이 질문으로 답하지 않는 사람 중 하나. 도어록 비번을 알려주고, 동은이 편히 여길 바둑판만 하나 두고.어느 날엔가 찾아와 한 수 두고, 전화 안 받아도 좋고 전화 안 해도 좋다고. 딱 돌 하나 두고 가는 그 정도 소식이어도 된다고.
   구는 자리를 비우거나 긴 회의를 갈 때나 회식을 갈 때, 이야기하고 싶은 건 언제든 좋으니 남겨두라고 한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알게 된다. 하고픈 이야기를 혼자 삭히거나 참지 않고 남겨둘 수 있도록 구가 언제나 내 몫만큼의 공간을 내어두었다는 사실을. 달리 무언가를 쏟아내지 않아도, 그냥 그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여정의 바둑판을 보고 자연히 구가 떠올랐다.
   
   
2. 취향이 닮아가는 것을 느낀다. 좋아하는 맥주가 같다는 것을 안 후로 그 맥주가 더 좋아졌고, 좋아하던 과자는 취향이 서로 바뀌었다. 나는 언제나 파란색 감자칩, 구는 언제나 연두색 감자칩이었는데, 이제는 바뀌었다. 나는 구 때문에, 구는 나 때문에 새로운 맛과 더 친해졌다. 봄 같아진 밤바람을 맞으며 걷다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두 캔 사고, 각자가 좋아하던 맛의 과자를 바꾸어 들고 집에 왔다. 택시 라디오에서 들린 벚꽃엔딩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흥얼거리면서.
   
   
   
3. 봄이 오나보다. 집에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 산 식물은 스투키, 두번째로 오래 산 건 금전수인데, 둘 모두 싹 비스무리한 것이 올라온다. 특히 금전수는 해마다 봄이 올 쯤이면 묵은 가지는 절로 노랗게 시들고, 안쪽에서부터 새순이 돋아 오른다. 눈에 먼저 보이는 것은 언제나 시드는 가지인데, 속상해하다가도 가만 살펴보면 구석 안쪽에 새순이 항상 하나쯤 돋아있다. 새순은 성장속도가 매우 빠르다. 살피는 것을 잊은채로 며칠만 지나고 보아도 쑥쑥 자라있다. 그게 제법 귀엽고 경이롭다. 다가오는 봄은 시든 것은 가뿐히 놓아주고 돋아나는 것은 품을 수 있는 그런 계절이기를.
   
   
   
4. 날씨가 좋아서 이불 빨래를 하고 가구 배치도 바꾸었다. 다른 환경에 나를 놓아두는 연습. 새로운 배치가 꽤 마음에 든다. 잘 부탁해 한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