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끝, 기차에서 흘러간 생각들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분주했던 한 달. 그나마 맺어지고 정리된 생각들을 글로 투척해본다.

 

1. 인디펜던트 워커 지난달만 해도 형체가 없었던 프로젝트 두 가지를 과감히 시도했다. 그야말로 인디펜던트 워킹..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정성들여/재미있게 하고 있다.
프로젝트 하나는 4월 첫 주에 첫 릴리즈를 앞두고 있는데, 함께 준비하는 동료와 나는 수시로 마음이 설레고 긴장된다. 별다른 호응이 없을까봐 긴장되는 마음을 구에게 털어놓았더니, 우문에 현답을 주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파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프로젝트는 가치롭다고. 딱 마음에 드는 말이었고, 내 초심은 그걸로 삼기로 마음 먹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도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다른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 중. 이슬아 작가의 강연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을텐데, 집에 가는 길에 구에게 벽에 막힌 듯한 기분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나도 내가 잘 알고 잘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무언가 넓고 깊은 일을 해내고 싶다고. 그때 구가 잘할 것 같다고 권했던 것 중 하나를 나만의 방식으로 시도해보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게 통상의 방법인지도 모르겠고,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내 방식대로 해보는 중이다. 전체가 완성되면 가장 먼저 구에게 보여줘야지 생각했다. 내게 해준 말이 시작점이 되어서, 그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그래서 짧은 조각들은 꽤 여기저기 공개 중임에도 불구하고, 구에게는 아직 한 조각도 보여주지 않고 모아두는 중이다. 조금 더뎌도 계속하여 쌓아봐야지.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2. 알고리즘1 가끔 내가 랜덤하게 집어 읽은 책들이 나에게 어떤 연속된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갑자기 미끼를 문듯이 휙 하고 건져올려지는 생각들, 그리고 거기서부터 확장되는 무언가를 볼 때마다 독서를 예찬하게 되고.. 하나는 오늘이었다. 달벗들과 문학에 시대정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토론을 하다가,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때 떠오른 책 페이지가 있었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도서관>이라는 책에서 봤던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에 대한 생각. 어떤 죽음도 죽음 그 자체가 망자의 삶을 압도하지 않는데, 자살만큼은 죽음이 삶을 압도해버린다고. 그래서 어쩌면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도 우리가 지양해야하는 표현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단톡방에 페이지 사진을 올려두었고 이야기는 다시금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으로 흘렀다. 그 페이지를 읽은 달벗은 관련 연구센터장에게 전달해야겠다고 말했다. 전달된 내용이 또 어떤 갈래로 확장될지 궁금하다.

 

3. 알고리즘2 이번주에 읽고 있는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많은 텍스트를 교차하며 짚어낸 것이 대단하다. 지금 내가 착수 중인 프로젝트도 어쩌면 룰루 밀러의 작업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동안 할아버지와 아빠 간의 대화를 들으며 들었던 감정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하다가 구가 부모님과 꽃구경을 갔다 일어난 일을 들려주었는데, 마침 나의 경험과 맥이 닿는 부분이 있어서 한참을 깊이 대화했다. 나는 내 아빠까지만 가 닿고, 아빠의 아빠까지는 닿지 못하는 편협한 ‘이해심’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그린 만다라트 중 1개-할아버지 이해하기-는 손도 못 댄채로 끝날 것 같다고 말이지. 그러자 구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의 자식에 대해서는, 나의 부모에 대해서는 내가 모든 것을 잃더라도 지켜주고 싶은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고. 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마음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구의 이야기 덕분에 새로운 관점을 들일 공간이 생긴 셈이다. 할아버지에 대입하면 여전히 잘 소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날의 경험은 실로 유의미한 확장이었기 때문에 나는 또 그로부터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4. Spring Night 구는 잊을만하면 기발한 다정함으로 나를 놀래킨다. 그저께는 갑자기 나를 위해 차려주겠다며 저녁 메뉴 구성을 들려주길래 갑자기 웬 조합이지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 주 전 내가 스치듯 먹고싶다고 이야기했던 음식. 그런 이야기를 한 것조차 잊고 있었던 터라 다음날에서야 아 그랬었지! 하고 생각이 났다. 여운이 오래 남는 다정이었다. 한 발 더 나가 오빠는 요즘 깍두기를 담글 궁리 중. 골똘한 구 옆에 앉아 장바구니를 훔쳐보다가, 내게 줄 몫의 김치통까지 장바구니에 담아둔 걸 보고 뭉클해졌다. 나는 구에게 어떤 다정을 건네고 있는가 생각했다. 내뱉어놓고도 까먹은 것들이 많은 느낌이다. 기발하고 여운이 남는 다정을 많이많이 주고싶다. 올해도 함께 봄꽃을 보며 걸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

 

5. 울리고 웃기는 타인의 다정에 대하여 다시 1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이긴 한데, 모르는 이의 다정에 대한 일화가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월요일에 등교를 해서 책상 서랍을 열었는데 웬 노트가 들어있었다. 주말 사이 우리 학교에서 있었던 공무원시험 응시생이 남긴 것이었는데, 귀한 자리 내주어서 고맙다고, 정돈된 자리를 내준 덕분에 시험 잘 치고 갈 것이니 이 자리에 앉을 학생에게도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뜻밖의 곳에서 만난 뜻밖의 문장이 참 생경하게 좋아서 남은 학기 내내 서랍 안에 그 노트를 보관했었다. 부적처럼.
서울을 올라오는 기차에선 무리한 요구를 하는 진상 손님을 만났다. 응대하는 내내 차분함을 잃지 않고 설명하는 승무원이 인상 깊었다. 오지랖일 수 있지만.. 서비스콜 기능을 이용해서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힘든 상황이었을텐데 침착하게 안내하는 모습이 멋있었다고. 익명의 누군가가 건넨 따뜻한 말 하나로 별볼일 없던 하루가 별스레 좋았던 날로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아니까 오지랖 같아도 그냥 남겼다.

 

6. 피드백 휴가를 가기 직전 날 밤 자정까지 야근을 하면서 팀장님 실장님께 아주 긴 메일을 남겼었다. 내게 의견을 요청한 사안이 있었는데 그 의견을 정리하다보니 글이 매우 길어졌고..족히 4천자는 될 글이 완성되었다(사수의 표현에 따르면 마치 논문 같았다고..). 기존의 보수 체계와, 외부의 요구 취지를 고려했을 때 변화가 필요한 부분, 적용안을 분석한 회신 자료였는데, 사수는 그 메일을 보고 불쾌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팀장님은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실장님 의견은 내일 물어봐야지. 주어진 틀 안에서 돌아가는 업무도 탈 안나게 해내고는 있지만, 역시 나는 뭔가를 만들어낼 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인간 같다. 자신이 없는 영역이지만 작성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걸 보면 말이다. 연장선상에서, 2023 만다라트 1분기 점검을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조만간 해봐야겠다.

 

7.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 어떤 밤에는 이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꽤 긴 시간 연락을 않다가 갑자기 연락을 준 선배였는데, 대뜸 오랜 연인과 잘 헤어지는 법을 물었다. 그런 것이 있기나 한가? 싶었긴 한데, 잘못 헤어졌다는 후회가 없는 것을 보면 제법 잘 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얼마 전에 그 애에게서 연락이 왔기도 해서, 어려운 일 앞에서 나를 떠올리고 연락을 준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8. 요즘 빠진 것 : 페타치즈 레시피 - 오늘도 해먹었다 / 코쿤의 새 앨범 - 다 좋지만 홈보이 정말정말 좋다 / 의지로 작동하는 행운 / 프렌즈

내 최애 시트콤, 프렌즈를 다시 보고 있다. 시와 함께 이야기한 프렌즈 토크 때문. 전시든 스튜디오든 가보고 싶어서 갑자기 la 투어를 막 생각하다가.. 일단 보류. 여행 쿨타임이 제법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