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entors, keepers

배의 고등학교 은사는, 가슴 아린 연애를 마친 이후 ‘아 이정도면 결혼할 수 있겠다’ 싶은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한다. 깊고 진하게 사랑하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람과라면 평온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그 말을 들은 배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랑 없는 결혼이 그렇게 이루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새삼스럽게 밝히건대 나는 사랑주의자다. 사랑이 많은 것을 녹이고 세우고 채운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이 먼저고, 결혼은 그냥 따라올 수도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적잖이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사랑 없는 결혼’은 내 인생에 두고 싶지 않은 단어. 어느 때고 ‘사랑 없는 결혼’보다는 ‘결혼 없는 사랑’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사랑에 관한 책(임지연, <사랑>)을 빌려둔 참이었고, 푹 빠져 읽다보니 앞서 언급한 은사의 ‘사랑 없는 결혼’의 정확한 표현은 ‘낭만적 사랑 없는 결혼’이라는 생각에 닿게 되었다. 사랑은 결국 새롭고 지속가능한 우리(하나가 아닌 둘)를 발명하는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사랑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반복해서 선언되고 새롭게 발명될 때 빛을 발한다. 출발점으로서의 사랑, 낭만적 사랑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사랑을 억압한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치환하고 읽으니 그것도 가능하겠다는 이해에 닿게 되었다.
마음곁 선생님은 항상 ‘사랑도 의지를 갖고 해야 한다’고 말했다. 책에서 언급하는 ‘doing love’, 그리고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구축’, 미셸 푸코가 말하는 ‘헤테로토피아’적 사랑도 모두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남자친구가 한창 이직을 고민할 무렵,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달라질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새롭고 지속가능한 형태의 사랑을 내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다.
오빠 앞에 더 넓은 세상이 열리고 있구나 생각하는 요즘이야. 오빠 마음에 귀를 잘 기울이고 한 선택일테니 그게 무엇이든 지지해. 설사 그 선택이 후회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 다음에 오는 선택의 순간을 잘 보내면 되니까 걱정은 하지마. 나도 나대로 당장 오빠가 없는 월화수목금을 어떻게 채워야 할 지 생각해봐야겠지만, 덜 보면 덜 보는대로 또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세계가 펼쳐질테니까 그것도 그것대로 기대가 돼. 어디에서든 정말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남자친구도 매순간 새로운 우리를 발명하고 있다.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적응하고 견디기 위해 내가 가까워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 데이트 일정을 잡을 때 고려하는 요소들, 조금 비효율적인 동선의 출퇴근길, 나를 단번에 웃겨버리는 방법까지도 터득해가면서.

사랑과 결혼 중 무엇이 우선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유일하게 물어야하는 질문은 결국 아래 두가지 같다.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좋은 삶을 지향하는가?

발명하는 사람이 임자다.